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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시물 분류 및 제목 : 상생문화총서 ▷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  글작성인 : 상생출판사    작성일자 : 20-01-14 16:10
조회 : 176  

잃어버린 역사 보천교


김철수 | 161*232mm | 하드카버 양장 | 493쪽 | 24,000원

[책소개]

보천교의 참역사!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적인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당대 기록물을 종합하여
보천교의 진면목을 되찾은 책.
조선 왕조가 패망당한 후
시국時國이라는 나라를 세우려 했던 보천교.
나라 잃은 민중에게
새 희망의 개벽사상을 불어넣은
보천교의 정신과 실상을 밝혀내었다.


[저자소개]


김철수
경북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 교토(京都)의 佛敎大學에서 연구하였다. 저서로는 『한국사회의 청소년과 종교』 『일제식민지시대 생활상태와 사회사업』 『東亞 社會價値的趨同與衝突-中日韓靑年的社會意識比較』(공저) 등이 있고, 주요 논문으로는 『역사사회학의 방법과 전망』『朝鮮總督府の宗敎政策-(朝鮮神宮)の設立をめぐって』 『末法思想과 三階敎의 社會活動性』 『일본의 역사사회학 - 가족과 (신)종교 연구를 중심으로』 『일본사회의 종교회귀 현상과 종교의 私事化』 『일본 신종교의 생명주의적 세계관』 등이 있다. 증산도 사상에 관심을 가진 이후로는 주요 연구논문으로는 『증산도의 의세사상』 『증산도 사상에 나타난 ‘남조선 사상’』 『‘남조선 사상을 통해 본 후천선경론』 『낙태를 통해 본 증산도의 생명사상』 등 다수가 있다. 현재 증산도 상생문화 연구소 연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목차]

프롤로그

Ⅰ. 일제시대 종교정책과 보천교
1. 식민권력과 민족종교
2. 메이지 정부의 국가신도와 종교정책
3. 신민권력의 '비종교' 신사 설립과 '종교'의 분리통제
4. 민족종교의 교단 공개와 친일화 유도
5. 보천교의 몰락

Ⅱ. 보천교와 민족 독립운동
1. 종교지형과 보천교
2. 1910년대 차경석의 '갑종 요시찰인' 편입
3. 국권회복운동과 차경석의 교단 조직 형성
4. 3ㆍ1 운동 이후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
5. 보천교의 운명

Ⅲ. 식민권력의 형성과 보천교
1.『보천교일반』 (1926)
2. 1910년대 식민권력과 종교정책
3. 고천교의 포교활동과 조직
4. 식민권력의 종교 탄압과 보천교의 갈등
5. 보천교 연구의 과제

Ⅳ. 식민권력의 종교정책과 국가신도
1. 황민화 정책과 종교
2. 지금까지의 연구들
3. 조선신사 설립계획
4. 제신논쟁과 황민화 구상
5. 국가와 종교

보천교 연도별 주요 사건
참고문헌
찾아보기
[보천교관련 주요 자료]


[프롤로그]

오래된 기억이다. 어느 해 가을 날 친구들과 김천 직지사를 간 적이 있다. 거기서 산비탈에 만개된 매우 수수한 들국화 군락을 만났다.
매년 스치듯 무심히 보았던 꽃이지만 그날 처음으로 들국화 향을 맡았다. 그렇게 은은한 향은 난생 처음이었다. 그 다음부터 계절이 돌아오면 의독적, 비의도적으로 들국화를 찾아다녔다. 국화도 아닌 들국화를.
그리고 나중 알고 보니 그건 국화과의 구절초였다. 매년 때만 되면 여기저기 군락을 이루어 피어나는 꽃을 보고 왜 난리냐고 할테지만 그건 기억이자 젊은 날의 추억이었다.

1999년, 또 한 번의 밀레니엄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보천교를 만났다. 그건 들국화와도 같았다. 천도교, 대종교, 기독교, 불교 등 친숙하면서도 조직성 있는 종교들, 일제 식민지 상황에 저항하며 민족의 독립을 갈망하며 민중들을 위로했던 종교들.
이에 비해 보천교는 화려하지도 않고 사람들도 알아주지 않는 종교였다. 심지어 ‘유사종교’라는 무거운 비난의 짐을 메고 허덕이는 종교였고, 사람들이 애써 눈길을 피해버리는 존재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런지 학자들의 연구 대상에서조차 소외되어버린 종교였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들국화와도 같은 이 종교에 주목하게 되었다.

대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 한국의 종교에 대해 몇 차례 강의를 들은 기억은 있지만 당시 강의의 대부분은 기독교나 불교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저 용어 정도만 들어본 터였다. 그것도 부정적 의미로. 그런 종교에 관심을 보인 건 어쩌면 학위를 마치고 일본의 교토[京都] 불교대학에서 연구할 때 가련한 내게 아낌없이 연구 환경을 지원해 주었던 노무라 히로시 교수 덕분이었을지도 모른다.
노무라 교수는 교토대학 철학과에 재학 시 징집되어 평양에 배치되었다가 일본의 패전 뒤에는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3년간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 들었다고 했다.
노무라 교수처럼 우여곡절 끝에 살아 돌아온 학생들을 대상으로 당시 교토대학에 개설된 종교학 강의에서는 삶과 죽음을 주제로 열띤 토론이 전개되었고, 이를 수강했던 노무라 교수는 만감이 교차하면서 이때부터 종교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다 한다.
그런 노무라 교수는 내가 조선조 말과 일제시대의 종교 지형을 공부한다고 했을 때 ‘백백교’를 들고 파 보란다. 아는 사람은 잘 알고 있겠지만 일본인 학자가 백백교를 아는 것도 놀랍지만(물론 나중 보니 일본에는 백백교에 관련된 자료들이 일부 있었다) 무척 당황스러웠다.
영화로도 소개되면서 소위 사교邪敎의 대명사 격으로 알려진 종교를 연구해 보라니.
그 때만 해도 종교라 하면 불교, 기독교 동학(천도교)에 관심을 가질 때였다. 아니 모두 그렇게 알고 있을 때였다.
그러나 노무라 교수의 변은 이러했다. 19세기말, 서세동점西勢東漸의 광풍에 직면한 이후 정신적 가치를 우선한 동양문명은 서양문명에 대항해 일종의 문화적 자긍과 정신적 자부의 성향을 갖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의 메카니즘이 붕괴된 혼란한 시대상황에서, 동양의 문화적 자긍과 정신적 자부의 원천은 ‘종교’로 응축되었고, 따라서 종교는 동시대의 사회혼란과 문명의 폐단을 해결할 수 있는 효과적인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한국에서는 동학과 증산사상이 그러했다.
이러한 상황에 일본 제국주의는 1905년 한국에 통감부를 두어 보호국으로 만들었다. 그 후 5년 뒤인 1910년에는 아예 무단으로 한국을 강점하여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나라 이름도 ‘대한’을 ‘조선’으로 바꾸었고 이에 따라 ‘조선총독부’를 설치하여 일본의 한 지역인양 식민정책을 펴 나갔다. 식민권력에 대한 저항이 일상화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의 종교문화를 강의할 때마다 종종 학생들은 식상한 질문을 한다. “교수님, 일제시대를 살았다면 독립운동을 하셨겠습니까?” 말이 쉽지 곤혹스럽다. 못 했을 것 같다. 살아가는 것 자체가 힘들었을 테니까.
이러한 시대에 종교란 뭘까? 식민지 상황은 모든 게 왜곡되고 비틀어진 세상이다. 역사와 문화가 다른 민족을 지배하고 지배 당하는 현실은 모순투성이다. 더욱이 식민권력에게, 든든한 뒷 배경(서구 열강)도 없이 민족혼을 품은 민족종교는 식민권력에게 눈엣가시일 수 밖에 없다.
식민지 상황에서 어떤 종교가 제 기능을 할 수 있었겠는가. 어쩌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 종교들도 무슨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 속에 감추어진 것이 무엇인지 선입관을 갖지 말고 연구하는 태도를 지니라는 이야기였다.

19세기 중반 수운 최제우(1824~1964)가 동학을 창교한 이래 많은 민족종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천교는 증산 강일순(1871~1909) 사후 차경석(1880~1936)이 조직한 교단이다.
차경석은 일제강점기의 시작과 함께 종교 활동을 시작하여 1920년대 전반기에 자칭, 타칭 600만 명이라는 많은 신도를 확보하면서 보천교 교단을 세웠다.
그러나 종교단체가 주도했던 3.1 민족독립운동을 경험한 식민권력은 인적 자원과 자금이 풍부한 보천교를 좌시하지 않았다. 집요한 공작으로 보천교의 각종 활동을 방해하고 민심을 이반시킴으로써 보천교 교단은 1925년 경 이후로 변화, 쇠퇴의 길을 걸었고 1936년에 교주 차경석이 사망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국가가 식민지되는 상황에서 아직 채 제도화되지 못한, 더욱이 교조의 사망으로 혼란스런 교단을 정비하고 자신만의 새로운 계통의 종교를 제도화시켜야 할 종교가가 만난 운명은 절망적이었다.
더구나 내부적으로도 뚜렷한 후계자 없는 교단의 분열양상은 특정 종교가의 교단 형성에 분명한 장애물이었다. 이렇듯 내, 외부적 어려움에 직면한 보천교가 민족말살과 동화정책을 성공시키기 위한 식민권력의 집요한 공작에서 벗어나기는 힘든 상황이었다.
그 결과 한때 교세를 떨쳤던 보천교는 1920년대 중반 이후부터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조선총독부의 촉탁이었던 무라야마 지준이 정리한 [조선의 유사종교](조선총독부, 1935)에는 ‘천도교, 보천교 양교 분포연혁도’가 첨부되어 일제강점기에 식민권력도 천도교와 보천교가 소위 지배적인 민족종교였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보천교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초보적인 수준을 면치 못하고 있다. 단편적인 연구논문들은 여러 편 발표되었지만 한권의 책으로 된 체계적인 연구물이 1편 정도 보이는 실정이다.

지금까지 보천교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이강오 교수를 비롯하여 홍범초, 황선명, 안후상, 김재영, 김철수, 일본의 조경달 등에 의해 주로 이루어진 것이 전부이다. 그 중에는 보천교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드러낸 글들도 보인다.
그나마 옛 보천교 본소지역인 정읍지역에 거주하는 정읍 역사문화연구소 김재영 소장과 안후상 선생이 지금껏 꾸준히 보천교 연구의 활성화와 위상정립에 아낌없이 노력하는 점이 다소 위안이 된다.
주로 한국내의 각종 역사적 문헌(신문자료, 공판자료, 교단 자료 등)과 증언 자료들을 통해 연구하여 보천교의 활동내용과 일제의 탄압 그리고 민족독립운동에의 적극적 기여도 등을 밝혀냈다. 일제하 민족종교 연구에 모두 소중한 자료들이다.
이 책을 구성한 글들도 기존에 발표된 글의 내용을 보완하거나 재구성해 실은 것이다.
[일제시대 종교정책과 보천교]는 [선도문화] 20권(2016)에 [일제하 식민권력의 종교정책과 보천교]이라는 체목으로 발표된 내용이고,
[보천교와 민족 독립운동]은 정읍역사문화 연구소가 2016년 8월 주최한 ‘동학농민혁명 이후 근대 민족운동-일제강점기 보천교의 민족운동’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후 [신종교연구] 35집(2016)에 [일제 식민권력의 기록으로 본 보천교의 민족주의적 성격]의 제목으로 게재된 글을 재구성한 것이다.
[식민권력의 형성과 보천교]는 [종교연구] 74-2(2014)집에 [1910~1925년 식민권력의 형성과 민족종교의 성쇠- [보천교일반(1926)을 중심으로]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글을 정리한 내용이다.
그리고 뒷부분에 일제시대의 종교지형을 보면서 지나칠 수 없는 신사정책에 대한 글을 첨부하였다.
[식민권력의 종교정책과 국가신도]는 원래 노무라 교수와 공동으로 발표한 교토불교대학의 [사회학부 논집] 31호(1998)의 [조선총독부의 종교정책]과 [순천향 인문과학논총] 제 27집(2010)의 [‘조선신궁’ 설립을 둘러싼 논쟁의 검토]를 정리 보완한 것이다.

일전에 어느 대학 연구소에서 ‘조선신궁을 둘러싼 일제시대 종교정책’을 발표했더니만, 종교정책과 신사정책은 분리해서 다뤄야 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었다.
특히 일본에서 연구한 학자들의 경우가 더욱 그러했다. 너무나 상식적인 이야기이다. 종교와 신사를 분리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식민지 상황에서 그것이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염없이 짓밟혀도 좋다. 쓰레기통에 던져져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폐품이 되어도 좋다. 보천교에 씌여진 식민주의적이고 제국주의적 시각을 조금이나마 제거할 수 있다면 그래서 ‘사이비’ ‘반민족적’이라는 힐난과 비난이 사라지게 된다면 아무래도 좋다.
두 눈 부릅뜨고 보려는 건 아직 내가 식민권력에 저항했던 보천교의 힘과 밝혀지지 않은 활동에 어느 정도 확신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대학원 시절부터 종교연구의 모티브로 삼아온 종교사화학자 뒤르켐E. Durkeim의 강조점을 되새겨 본다.
“그릇된 종교란 없다. 모든 종교는 나름대로 진실하다. 그 방법들은 서로 다르다 할지라도 모든 종교는 인간존재의 주어진 여건들과 부합된다.”
누군가 프랑스의 인상파 미술의 창시자 클로드 모네Claude Monet라는 화가에 대해서 ‘하나의 시선일 뿐이다. 하지만 그 시선은 얼마나 찬란한가’ 라고 얘기했다. 시선 하나로 혹평을 받았던 한 사람의 인생이 정리될 수 있는 것 같다.